알렉산드르 타라소프

일식(日蝕).
안토니오니의 영화와는 다른 모습으로

1994~ 1995 사이 러시아 학생 데모 대중 매체:

현상에 대한 연구

 

 

...신문과 잡지는 사람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것은 모든 서구 민주주의와 관계된 문제인데... 정기간행물들은... 노동자 사회나 대학생 사회 등과 같은 삶의 전반적인 분야를 무시한다...

안젤로 보카


우리 시대는 훌륭하게 교육받은 수천의 사람들이 자신의 모든 시간을 사회의 집단적 견해를 소유하는데 바치고 있는 역사상 최초의 시대이다. 그 견해를 조종하고, 이용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소유하는 것이다.  

마샬 맥루한


파괴해야 할 필요가 있는 두 개의 시스템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마피아와 텔레비전이다.

에드워드 텔러


        나는 우리의 대중 매체가 학생 소요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연구하고, 이런 개별적인 예를 통해 우리나라의 대중 매체 발전(또는 정반대로 퇴보)의 몇몇 경향을 파악하는데 소박한 목표를 두었다.

왜 하필이면 학생 소요 (데모)인가?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모든 시민 소요, 이것은 당연히 «제일 중요한 주제»이며 신문 제 1면 뉴스 표제를 장식하는 재료이다. 둘째로 학생 소요라는 주제는 사회적 인식 속에서 신화화되고 신성시되어서, 우리가 당연히 알고 이해하고 있듯이 사람들은 그 사건들을 읽고, 흥미를 갖고, 몰입하고, 예의 주시한다. 예를 들면 1968년 5월 사건, 소르본느, 바리케이드, -벤디트, «청년 혁명», «세대 갈등, 히피, «비틀즈», 루디 두츠케, «민주 사회를 옹호하는 대학생들», 우드스톡, 재니스 조플린, 밥 딜런, «The Time They Are a-Changin»사르트르, 고다르, 마르쿠제, «여름이 왔다. 거리에서 투쟁할 시간이 왔다...» 등등이 그것이다. 우리 대중 매체에서 지금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40대들에겐 젊은이에 대한 회상, 이것은 신성하며… 셋째로 젊은이와 관련된 주제는 유익하다. 모든 사람들이 이것을 읽고, 볼 것이다. 왜냐하면 젊은이들은 이 주제가 자신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며, 나이든 사람들은 모두 자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최근 10년 동안 히피족 조직체, 젊은이의 마약 중독, 문화의 일부로서의 록, «카잔 (Kazan’ – 러시아 도시 이름) 청년 불량배 그룹» 등에 관한 기사와 영화에서 수 차례 입증되었다. 넷째로 학생 소요야 말로 단지 눈에 띄는 구경거리가 아니라 전문가가 말하듯이 «아름다운 장면»이며 텔레비전은 특히 이것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이렇게 이야기하면 모든 게 다 좋다고 하면서도 특별히 어떤 학생 소요를 말하는 것인지 이의를 달 게 뻔하다. 아무도 그런 소요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바로 이 점이 가장 중요하다. 소요는 있었다. 그런데 그 소요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러시아의 대중 매체가 만든 공백을 메우기 위해 우선 소요 자체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자 그럼, 첫 번째 소요. 1994년 4월 12일. 모스크바.

소요는 정부 청사(«러시아의 백악관») 앞에서 가진 소규모 시위 집회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소요를 이끈 것은 장학금의 인상과 정시 지급 요구를 지지하는 대학생 조합 합동 연합회(APOS)라는 공식적인 단체였다. 공식 조합이 자주 하는 방식대로 몇몇 러시아 중부 도시 칼루가, 트베리, 펜자, 보로네슈의 학생 대표들은 버스를 타고 집회에 도착했다. 모스크바 대학생들이 당연히 그들과 합류했다. 시위 학생의 전체 숫자는 5천명에 달했다. 물론 시위 집회에는 학생들 사이에 끼여 친밀한 말투로 선동하고 자기들이 발행한 간행물을 적극적으로 판매하는 공산청년동맹원과 무정부주의자 같은 좌파의 대표자들도 나타났다.

길거리에 선 채로 무익하고 지루하게 2시간을 허비해 버리자 시위대의 인내심은 모두 소진되어 버렸다. 정부는 노골적으로, 마치 보란 듯이 이 집회를 무시해 버렸다. 좌경 세력의 선동을 받은 대학생들은 거리에 있던 건설 현장 사무실 지붕을 연단 삼아 자발적인 시위를 조직했다. 조합의 공식 대표들은 이를 제지하려 했지만 아무도 그들 말을 듣지 않았다. 학생들은 응어리져 있던 모든 것을 정부와 대통령을 향해 차례로 외쳐댔다. 하지만 이 연사들은 웅변가처럼 세련되게 의사를 전달할 수 없었으며 그런 이유로 그들의 말은 논쟁적인 비판에서 «높으신 분들»에 대한 욕설로 급속히 옮아가 버렸다. 이 때 집회 경험이 많은 좌파 지도자들이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들은 혁명적인 언사로 집단을 이끌며 크레믈린 쪽으로 행진해가서 붉은 광장에서 집회를 갖자고 호소했다. 그런 집회는 권력 기관이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장학금을 지급하라! 장학금을 지급하라!», «모든 권력을 학생에게!», «엿먹어라, 부르주아!», «옐친 멍청이!»라고 큰소리로 외치면서 군중은 () 아르바트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행진에는 2천 5백에서 3천명 가량의 사람들이 참가했다. 조직력은 형편없었다. «항의 행진»은 오히려 일반인의 산보를 연상시켰는데 정치적 목적의 활동가들이 모여 있던 제일 앞 몇 열만이 질서정연해 보였다.

시위대는 신 아르바트 거리에서 차량 흐름을 중단시켰다. 교통 경찰은 차량을 우회시켜야만 했다. 하지만 어떤 «() 러시아인» (신흥 벼락 부자의 속칭)이 외제차를 타고 용감하게 대열 쪽으로 밀고 들어와서 학생 가운데 한 사람을 차로 들이 받았다(다행히 그 젊은이는 타박상만 입었다). 화가 난 학생들은 바로 그 자리에서 외제차 앞 유리창을 부수고 차와 함께 태워버리겠다고 «신 러시아인»을 위협했다. 참가자들의 기억에 따르면 «그 부르주아는 마치 생쥐처럼 차 안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경찰과의 첫 번째 충돌은 «10월» 영화관 맞은편에서 일어났다. 대열을 멈추게 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학생들은 경찰 저지선을 뚫었지만 세 사람이 체포되었다(그들 가운데는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주도 협회(IREAN)의 지도자인 드미트리 코스텐코가 있었다). 이 일이 있은 다음 학생들의 분위기는 더 급진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으며 «장학금을 지급하라!»는 구호도 이미 특별히 반정부적이고 반대통령적이며 대체로 반자본주의적인 것으로 변했다. 또 몇 개의 경찰 저지선을 와해시킨 다음, 대열은 경찰 특공대와 충돌한 쿠타피야탑 구역에 있는 마네슈 광장으로 나왔다.

학생들의 적극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시위 행렬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수백 명의 시위대(여러 자료에 따르면 300명에서 600명 정도)는 알렉산드로프 공원을 통해 '역사의 통로' 쪽으로 뚫고 들어갔다. 공산청년동맹원과 무정부주의자 그리고 청년 신 좌파(new left)인 «빨치산 운동» 활동가들이 이 집단을 구성하고 있었다. «문화 전복주의» (counter-cultural)적 성향의 '자주빛 인터내셔널'의 지도자인 알렉세이 츠베트코프가 어느 순간에 경찰 저지망을 뚫은 이 집단을 이끌고 있었다.

'역사의 통로'에서 시위대는 월등한 세력의 경찰 특공대와 맞닥뜨렸다. 시위대의 대부분은 이 곳에서 두들겨 맞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 밖의 다른 사람들 중에는 심각한 뇌진탕을 입은 사람도 있었으며 알렉세이 츠베트코프도 대열에서 벗어났다(나중에 그는 오랫동안 치료를 받았으며 지금까지도 의사의 관리를 받고 있다). 그러나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주도 협회(IREAN) 활동가들을 필두로 하는 100 ~ 150명의 학생들은 경찰 특공대의 사슬을 뚫고 «»백화점으로 «모습을 숨겼다». 그 곳에서 그들은 큰 소리로 구호를 외치기도 하고 붉은 색과 검은 색 깃발과 혁명적 내용이 적힌 현수막을 흔들기도 하면서 한바탕 소란을 일으켰다. 정확히 «»백화점 중앙의 분수대 옆에서 값비싼 양복과 가죽 외투를 입은 어떤 «신 러시아인»이 시위 군중의 외모와 그들의 깃발 색깔에 대한 불만을 표하기 위해 시위대를 제지하려다가 학생들에 의해 분수대에 던져졌다.

«»백화점 내부를 질주한 다음, 학생들은 붉은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그 곳에는 이미 다른 경찰 특공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깐 동안의 충돌이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시위대는 결국 흩어지고 말았다.

소요 과정에서 60명에서 80명 정도의 시위 학생이 심한 타격이나 외상을 입었으며 9명이 체포되었다. 잡힌 사람들에 대한 재판은 다음날 개최되었다. 법정에 기자들은 없었다. 나중에 몇몇 시위 학생들에게는 사법 수속에 의하지 않은 조치가 취해졌다(그래서 법정에서는 경고로 그친 D. 코스텐코는 대학원생 지위를 박탈당했다).

1994년 4월 12일의 학생 소요는 «대학생 권리 수호» 조합 창설을 자극하는데 기여했다. 적극적으로 소요에 참가한 바로 그 학생들이1994년 4월 16일에 모스크바 국립 대학교에서 조합 결성 총회를 개최했다. 당시 소요에 활동적으로 참가한 많은 사람들이 조합 집행부에 들어갔으며 D. 코스텐코는 집행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95/1996 학년도 초에 «대학생 권리 수호»는 이미 러시아의 20개 지역에서 12,800명의 회원을 지니게 되었다.

1994년 4월 12일 소요는 1993년 10월 국가 대변혁 시기 이후 모스크바에서 발생한(러시아 전역에서 발생했을지도 모르지만) 최초의 대중적인 가두 시민 소요였으며 소련에서 공부한 중국 대학생들의 시위 이후인 60년대 말부터 따져 모스크바에서 발생한 최초의 학생 소요였다.

우리나라의 대중 매체는 이 사건에 어떻게 반응했을까?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이 사실이 언론인들 가운데 누구도 그것을 몰랐거나 사전에 그것을 예견하지 못해서 아무것도 집어내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학생들이 현장에서 세어 본 방송용 카메라만 해도 18개나 되었으니까! 그 카메라들 가운데 3개(5개라고 해도 좋다)는 국가 정보기관 것이라고 가정해 보자. 하지만 나머지는 틀림없이 여러 방송사들 것이다. NTV를 제외한(«NTV 사람들»은 그 시간에 모스크바의 다른 쪽 끝에서 발생한 화재를 촬영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주요 방송사들은 모두 그 자리에 있었다. 방송사들 가운데 어느 한 방송사도 정부 청사 앞과 크레믈린 근처에서의 소요 소식을 한 장면도 방송하지 않았다!

그런 우연의 일치가 종종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우연을 믿지 않는다.

마침 서구의 텔레비전 기자들이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모스크바에서 발생한 학생 소요 사건의 전말이 영국, 캐나다, 프랑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스웨덴, 폴란드의 텔레비전 채널을 통해 흘러 나왔다. 이것은 내가 아는 나라들이다. 아마 다른 나라들도 있을 것이다. 실상은 이러하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도 러시아는 그 때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대중 매체를 갖고 있다고(말하자면, 그들이 당의 보도 지침을 벗어났으며 금융 자본의 보도 지침의 영향 하에는 아직 들어가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주장하는 «전문가들»을 믿을 필요가 있단 말인가?

대중 매체의 입장에서 격렬한 학생 소요에 대해 그토록 한결같이 침묵하는 것은 10월(1993년) 대변혁 이전까지의 유사한 사건들에 대한 대중 매체의 태도와 비교해 보면 정말 의미심장한 일이다. 1992년 2월 25일 트베르스카야 거리에서의 시위 군중과 경찰의 충돌(방금 살펴본 학생 소요 사건보다 전혀 덜 심각하지 않은)을 «주요 언론»과 전자 대중 매체 (텔레비전 등)는 아주 상세하게 보도했으며 나중에도 이 사건은 6일 동안 계속 «되새김질 되었다»(이 사건에 대한 세부적인 논평은 3월 6일까지 계속되었다).

6월 22일, «급진파» 진영에 대한 심각한 타격과 그에 뒤따른 행진, 리가역 광장에서의 경찰과의 충돌로 마감된 1992년 6월의 «허위의 제국에 대한 공격»은 텔레비전과 라디오(이건 당연하다) 뿐만 아니라 모든 중앙지와 유력 잡지에서도 최고의 뉴스 거리였다.

1993년 5월 1일에 레닌대로에서 있은 시위대와 경찰과의 충돌은 최대한 상세하게 보도되었다. 비록 정부가 텔레비전으로 하여금 노골적으로 선전적인 노선을 취하도록 강제하긴 했지만 전자 대중 매체를 완벽하게 «억압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는데, 왜냐하면 텔레비전의 공식적인 논평과 나란히 참가자와 목격자의 심히 광범위한 견해들과 상세한 녹화 장면이 제시되어 점차로 독립적인 판단 능력이 있는 관찰자가 사적인 견해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요» 신문에 게재된 상세한 논쟁과의 견해 차이가 상당히 컸다.

1993년 9월, 옐친의 포고령 1400호가 공표되고 «하얀 집»에 대한 포위 공격이 시작된 이후, 하지만 사건의 급격한 첨예화 이전까지(즉 스몰렌스크 광장에서 경찰 특공대와 시위대의 충돌 이전인 10월 2일 전까지) 전자 대중 매체에는 눈에 는 «어색함»이 목격되었다. 이미 10월 3일에 텔레비전은 시위대가 10월 광장에서 «하얀 집» 쪽으로 진출한 사실에서부터 «하얀 집»의 봉쇄 해제에 이르기까지의 제반 사건을 가장 상세한 형태로 보도했다. 국영 텔레비전인 1번 채널의 방송 중단조차도 사건 정보의 유지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리하여 만일 주민의 상당수가 10월 3일과 4일 사이에 이리저리 갈피를 못 잡고 혼란스러워 했다면 사건의 충분히 완벽하고 객관적인 정황을 신속히 재생해 알려주는 데는 합법적인 정보(10월 4일 이후로 반정부적인 출판은 한동안 금지 되었다)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1994년 4월 12일 학생 소요에 대한 침묵은 비슷한 종류의 사건과 관련해서 우리나라 대중 매체가 만든 최초의 «사각 지대»이다.

물론 1994년 4월 12일 사건이 언론의 주목을 전혀 받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언론이 이 사건에 대해 썼을까? «대안적 언론», 즉 아주 적은 판매 부수를 지닌 반정부적(특히 좌파의) 신문과 소식지가 이 사건을 다루었다. «붐바라슈-2017»은 자기 신문 주간인 파벨 빌레프스키의 상당한 분량의 기사를 게재했으며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대안적» 노동조합들의 소규모 신문은 유리 네르세소프의 기사를 실었고, 역시 페테르부르크의 «좌-우익» 반정부 신문 «러시아의 반항»은 «우리 신문의 작성자는 크레믈린을 습격한다»라는 특이한 제목의 G. 우다보프의 기사를 게재했다. «우리 신문의 작성자»는 D. 코스텐코를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코스텐코가 «러시아의 반항»지의 필진이 아니라면? 그 밖의 다른 간행물 중에는 별 이름도 없는 «좌익 정보센터 회보»가 «벨로카멘가(街)(모스크바를 말함-역주)의 학생 폭동»이라는 제목의 V. 레바츠키의 짧은 기사로 이 사건을 알렸으며 무정부주의자들의 간행물 «신(新) 네스토르»와 «검은 별»도 이 소식을 간단히 전했다. 게다가 이 두 간행물의 기사 내용은 동일했는데 그 이유는 동일 인물인 그 유명한 드미트리 코스텐코가 두 간행물의 기사를 작성하고 출판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출판물 가운데 오직 «붐바라슈-2017»만이 발행부수가 5천부이며 나머지 다른 간행물과 비교해 그나마 «정보 거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1억 5천만의 나라에 발행부수 5천 부짜리 신문이 대체 뭐란 말인가? 이 신문을 구독할 수도 없고 반정부 집회 이외에는 어디에서 살 데도 없다. 그리고 «좌익 정보 센터 회보»와 «신(新) 네스토르»의 발행부수는 수십 부에서 수백 부 한도에서 오락가락한다. 그래서 이 회보들은 발행된 다음 곧바로 희귀 문헌으로 변해버린다.

1994년 4월 12일 사건을 묘사한 이들 출판물의 많은 수가 지방 대학생들과 대체로 젊은 층에게 흘러 들어가 문자 그대로 종이에 구멍이 날 때까지 읽혀져, 그 결과 기사 내용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많은 일화들이 추가되면서 이미 각자의 기억에 따라 재생산되게 되었다. 그래서 1995년에 모스크바에 온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학생들은 4월 12일에 시위대가 거의 크레믈린을 습격했다고 믿었으며 바르나울에서 온 사범대학생들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그 곳에서는 4월 12일에 옐친이 헬기를 타고 크레믈린에서 황급히 대피했다는 아름다운 전설까지도 만들어졌다). 민스크의 대학생들은 1994년 4월 12일 모스크바에서 일어난 사건을 파리에서 일어난 «1968년의 붉은 5월»과 비교하는 전단지를 발행했다. 여러분은 모두 웃겠지만 전단지의 내용은 백러시아 KGB 요원들의 특별 회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 이후 전단지 내용 작성자인 «벨라루시 자유 대학생 연합» 의장 올레그 노비코프는 잠시 동안 «이웃 국가», 즉 우크라이나로 망명해야만 했는데 벨로루시 국가안전부는 정말 이상하게도 그곳에서 그를 찾지 못했으며...

두 번째 소요. 다시 모스크바. 다시 4월 12일이지만 이번에는 1995년.

4월 12일은 독립 협동조합 연맹(FNPR)이 정한 전 러시아 노동조합 활동 기념일이었다. 이들 «성인» 노동조합에 대학생 조합 활동 연합회(APOS)도 물론 가입했다. «대학생 권리 수호»는 APOS에 가입했다.

사전에 공지된 시간인 오후 3시경에 «하얀 집» 앞에 5천명의 대학생이 모였다. 집회에서 «대학생 권리 수호»는 비상한 활동을 펼쳤다. 특히 이 날을 즈음해 모든 희망자에게 배부된 막대한 양의 전단지와 주간지 «대학생 권리 수호»의 특별호가 발행되었다. 그밖에도 «대학생 권리 수호»의 연사들은 메가폰을 이용해 세 방향에서 교대로 돌아가면서 쉴새 없이 연설을 했다. 정부에 대한 «대학생 권리 수호»의 근본적인 요구 사항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일정한 수준 이상의 성적을 받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받을 권리를 빼앗는 러시아 정부 결정의 취소, 대학생과 고등 교육 기관 졸업자를 일반 사람들처럼 2년간 군복무에 임하게 하는 법률 제정에 대한 거부, 학내의 학생 자치 활동 확대, 대학 제정 활동 감시에 대한 학생 참여, 무료 학습 장소 축소 제도 중단과 상업 시설에 대한 기숙사 임대 중지 등이 그것이었다. APOS의 요구는 너무나 소박한 것이었는데 이 단체는 여느 때처럼, 장학금 지급을 미루지 말며, 만일 가능하다면 장학금을 올려달라는 요구가 전부였다.

트럭에 설치된 확성기로 연설한 APOS의 지도자 A. 쉐르비나는 과격한 경쟁자들(사람들은 주로 그들의 연설만 들었다)로 인해 금방 피곤해 졌다. 그래서 그는 «경찰에 넘기는» 재치 있는 방법으로 그들을 몰아낼 작정을 했다. 그의 요구에 따라 아무런 설명도 없이 경찰은 메가폰을 가진 3명의 연사(그들 중에는 «대학생 권리 수호»의 지도자인 드미트리 코스텐코와 러시아 청년 공산주의 연합(RKSM)의 지도자인 이고리 말랴로프가 끼어 있었다)를 체포했다. 체포된 사람들은 경찰서로 호송되었다. «대학생 권리 수호» 대표자의 대부분은 경찰서로 달려가서 체포된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학생들은 동요하기 시작했으며 차츰 난폭해졌다. A. 쉐르비나는 모험을 하지 않기로 결심을 하고 이제 막 시작된 집회의 종료를 선언하였다. 경찰은 학생들을 «하얀 집» 앞 광장에서 밀어내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사건은 이미 알고 있는 각본대로 빠르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지도부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조직적인 형태를 갖추었으며 대열을 이루어 철재 장애물과 경찰 저지선을 과감히 헤치면서 신(新) 아르바트 거리를 따라 크레믈린 방향으로 행진해 나아갔다. 시위대는 솔직히 자발적인 성격을 띠었는데, 단지 신 아르바트 거리와 사도포예 순환 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그 자리에 머물고 있던 «대학생 권리 수호»의 유일한 집행부 맴버인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알렉세이 츠베토프(문학 대학 학생이자 자줏빛 인터내셔널과 «빨치산 운동» 지도자)와 스타니슬라프 마르켈로프(법학 대학 학생, 러시아 사회-민주당(SDPR)원)가 대열의 선두에 나섰다.

알려진 것처럼 정부는 사건이 이런 방식으로 전환될 것을 사전에 알고 준비해 두었다. 갑자기 나타난 시(市) 경찰 보충대가 학생들을 뒤에서 공격했으며 신 아르바트 거리와 사도포예 순환 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경찰 특공대가 탄 차량들이 시위대의 진로를 막았다. 대열의 마지막 부분에는 주로 여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경찰의 공격에 제대로 저항할 수 없었으며 경찰은 여성에게 마음껏 곤봉을 휘둘렀다. 심하게 두들겨 맞은 여성들은 주변 집들이 있는 방향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대열의 선두는 그 사이에 경찰 특공대와 충돌했다. 경찰 특공대는 곤봉을 사용했고 시위 군중은 돌과 막대기, 빈 병으로 맞섰다. 학생들을 해산시키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오히려 반대로 학생들이 경찰 특공대 차량 유리창을 전부 깨뜨렸으며 경찰 특공대를 일부는 차량 안으로, 일부는 차량 뒤편으로 몰아 부치기 시작했다. 새로운 경찰 부대가 교차로로 접근했다.

학생들에겐 신 아르바트 거리를 따라 더 앞으로 뚫고 나갈 힘이 충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방책을 우회해 () 아르바트 거리로 뚫고 들어갔다. 그러나 그 곳으로 들어간 학생은 전부가 아닌 천 5백 ~ 2천명 정도였다. 경찰과 경찰 특공대는 시위대의 소집단들을 하나씩 와해시키면서 점차 뒤에서 압박해 왔다. 그러나 구 아르바트 거리에서 그 곳에 있던 젊은이들 가운데 500명에 달하는 숫자가 시위대에 합류했다.

이 순간 시위대는 이미 심하게 화가 나 있었다. «대학생의» 구호은 노골적인 반정부적, 반자본주의적 구호로 바뀌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옐친» 였다. "Fuck off 옐친" 대열의 선두에는 «자본주의는 똥이다!»라는 대형 현수막이 들려 있었다.

공권력은 구 아르바트에서 시위대를 저지하려고 여러 번 시도했지만 격렬한 싸움 끝에 매번 물러서야만 했다. 경찰 제 5구역 근처에서의 그런 시도가 가장 심각했다.

사나워진 학생들은 길을 따라가며 자기들이 생각하기에 특히 «부르주아적»으로 보이는 몇몇 쇼윈도를 부수었다. «부숴지지 않는» «올비»라는 백화점의 쇼윈도 앞에서 시위대는 특히 오래 시간을 끌면서 마침내 그것을 부셔버렸다.

아르바트에서 아르바트 광장으로 통하는 장소에 경찰과 경찰 특공대의 새로운 저지선이 이미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르바트 광장으로 향하는 대열이 진입을 시도할 때 가장 격렬한 충돌 가운데 하나가 발생했는데 그 과정에서 10명 이상의 학생들이 심한 외상을 입었고 경찰 특공대는 «자본주의는 똥이다!»라고 쓴 그 유명한 현수막을 찢어 버렸으며 «프라하» 레스토랑의 입구 유리창이 부셔졌고 경찰 한 명이 머리가 깨지는 상처를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 2백 명 정도의 학생이 방책을 가로질러 국방부 건물 방향으로 뚫고 들어가며 건물에다 돌, 빈 병, 잉크병 등을 던졌으며, 건물 앞에 일꾼들이 두고 간 페인트를 이용해 자기 앞에 있는 건물과 아스팔트를 반전 구호로 가득 메워 버렸다.

시위대는 아르바트 광장, 신 아르바트, 불바르 순환도로 등지에서 차량의 움직임을 멈추게 만들었다. 일부 학생들은 무슨 이유인지 신 아르바트를 따라 «하얀 집» 방향으로 진출하려고 시도했지만(아마 이 대로 구역에 있는 «특히 부르주아적인» 많은 쇼 윈도우에 마음이 끌렸을 것이다) 경찰 특공대는 그들을 곤봉과 최루탄 가스로 저지했다. 시위대의 대부분은 마네슈 광장 방향으로 향했다.

마네슈 광장에서 시위대는 경찰, 경찰 특공대, 치안 유지군의 연합 세력과 맞닥뜨리게 되었는데 그들은 대열을 처음에는 둘로, 그 다음에는 셋으로, 그리고 급기야는 «뿔뿔이 흩어놓기» 시작했다. 분산 작업은 학생들에 대한 대규모 «사냥»으로 변했는데 인접한 거리와 지하철역 조차도 사냥터가 되었다. 학생들을 곤봉으로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고, 발로 차고 «닭장차»와 버스로 끌고 갔으며 그곳에서 다시 때렸다. 지하철역에서도 구타가 자행되었다. 시위에 참가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경찰의 분풀이 감으로 함께 매를 맞았다.

세 갈래로 흩어진 학생 대열 가운데 두 집단은 비교적 쉽게 흩어버릴 수 있었지만 정치 활동가들이 모인 대열의 선두는 1994년의 시도를 기억하면서 알렉산드로프 공원으로 뚫고 들어가려고 했다. 이 시도는 부분적으로 성공해서 알렉산드로프 공원으로 약 5백 명의 시위대가 뚫고 들어갔다. 이 때 대열의 두 지도자인 A. 츠베토프와 S. 마르켈로프는 심각한 타격을 입고 대열에서 벗어났다(츠베토프는 두 번째 심한 뇌진탕을 입고 체포되었다).

알렉산드로프 공원에 모인 약 5백 명의 학생들은 조직적으로 레닌 박물관 쪽으로 향했는데 그 곳에서는 파시스트 서적을 나눠주는 사람들을 때려주며 적절한 공격을 가했다. 파시스트의 편을 든 경찰 특공대가 격투 장소에 적절한 시간에 도착해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학생들을 극장 광장 쪽으로 밀어붙였으며, 그곳에서 다시, 학생들이 최종적으로 흩어져 버리게 된 니콜 거리로 몰아붙였다.

소요 도중 2백 명 이상의 학생들이 여러 가지 외상을 입었으며 30명 이상이 하루 동안 구금되었다(더 많은 수의 학생들이 몇 시간 동안 잡혀 있었는데, 5, 11, 122 지구 경찰서는 이들 잡혀온 학생들로 가득 찼다. 신분 확인과 해명이 있은 다음 그들을 풀어주었다). 잡혀온 사람들 가운데 5명은 법정에서 벌금형이 선고되었고 나머지는 경고로 방면되었다. 법정 결정에 따라 혁명의 상징은 압수되어 폐기되었다. 소요 전에 «하얀 집» 앞에서 체포된 «대학생 권리 수호»의 세 연사는 법정에서 무죄가 입증되어 풀려나게 되었다. 작년과는 달리 이번에는 거꾸로 학생들이 경찰차 몇 대를 파괴했으며 두 명의 경찰관의 머리에 심각한 외상을 입혔다.

만일 1994년 4월 12일의 소요가 약 1시간 반 동안 계속 되었다면 1995년 4월 12일의 소요는 3시간 이상 계속되었다. 시위대는 1,100명 정도에 이르는 경찰관, 경찰 특공대, 치안유지군과 대치해야 했다. 소요는 사건의 발생을 미처 모를 수 없을 정도로 수도 중심의 주요 지역에서 벌어졌다. 최루탄 가스 냄새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러나 우리 «주요 언론사»와 전자 대중 매체의 기자들은 그걸 몰랐다니!

1995년 4월 12일, 학생들은 13대의 텔레비전 카메라와 언론사 신분증을 착용한 20명 이상의 사람들과 적어도 20명 정도의 사진 기자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 가운데 다시 국가 정보 기관원(텔레비전 카메라를 가진 최소 3인과 신문 기자 최소 5인이라고 하자. 텔레비전과 사진 자료는 나중에 법정에서 소요 참가자에 대한 기소 증거로 제출되었다)이 있었다고 해두자. 그러나 나머지는 정말로 진짜 기자들이었다. 그 자료들을 어디에 전달했을까? 이번에도 대중 매체는 침묵했다.

«대학생 권리 수호»에서 활동하는 학생들, 자줏빛 인터내셔널 그리고 IREAN은 아직 집회가 진행되고 있을 때, 그러니까 소요 이전에 자신들이 인터뷰(모두 해서 적어도 3건의 텔레비전 인터뷰와 적어도 2건의 라디오 인터뷰, 그리고 최소 6건의 신문 인터뷰가 있었다)를 했음을 기억하고 있다. 이 인터뷰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다. 이 또한 우연이란 말인가?

정부는 비록 겉으로는 이 두 집회를 무시했지만 실제로는 소요를 잘 인식했으며 조치를 취했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소요 후 곧바로 정부는 장학금에 대한 의무 조항의 조속한 완화와 대학생과 대학원생에 대한 장학금 인상 조치를 신속히 취했다. 1995년의 학생 소요 이후 곧바로 체르노미르딘 총리는 혁명은 광부의 파업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동요로부터 시작된다는 유명한 말(그의 말은 모든 텔레비전 채널에서 반복해서 보도되었다)을 하기까지 했다. 불쌍한 다수의 시청자는 그런 소리를 듣고 «무슨 소리야?»하며 아마 놀랐을 것이다. 왜냐하면 친애하는 시청자여, 학생 소요에 대해 체르노미르딘에게는 무언가를 보고하고 그대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체르노미르딘은 대체로 젊은이들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공개를 꺼려했다. 예를 들어 1995년에 학술원 회원 I. 일린스키가 소장으로 있는 청년 연구소(이전에는 청년공산당 간부 대학교) 부속 과학-연구 센터는 러시아 청년 현황 연구라는 특별한 전문 연구서를 출판했다. 상황은 너무나 암울하게 묘사되었고 체르노미르딘 총리는 이 책의 배포를 몸소 금지시켰는데 그 자체가 흥미로운 일대 혁신이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책은 금지 되지 않았고(민주주의 아닌가!) 다른 한편으로는 독자의 손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다시 1년 전처럼 «양자택일적» 언론들이 소요에 대해 썼다. «붐바라슈-2017»은 상당한 양의 사진과 함께 기사를 실었으며 4월 12일자 «대학생 권리 수호»지(誌)의 전단지에서 발췌한 캐리커처를 재연하기까지 했다. 캐리커처에는 다리가 짧고 지저분하게 생긴 학생이 «너, 이 나쁜 놈!»하고 소리지르면서 발로 체르노미르딘 총리의 엉덩이를 세게 걷어차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조합의 주간지 «대학생 권리 수호»는 소요(«모스크바에서 발생한 학생 동요»)에 대한 자료로 첫 페이지 전부를 장식했다. 이번에는 «리몬카»(발매부수 7천 부)가 소요에 대해 보도한 «양자택일적» 언론의 선두에 섰다. «리몬카»는 «대학생들이 싸움을 배우고 있다»라는 제목의 «빨치산»(«빨치산 활동 조직»의 회원이라는 점에서 그를 빨치산으로 부르고 있음-역주) P. 블라소프의 충분히 객관적인 기사를 게재했다 «주요 언론»은 물론 침묵했다.

«대학생 권리 수호»지는 정보의 봉쇄를 뚫으려는 시도로 4월 16일에 러시아-아메리카 프레스 센터에서 4월 12일 사건에 대한 특별 기자회견을 행했다. 거의 50명 기자(라디오, 텔레비전, 사진 기자들을 포함한 러시아 기자와 외국 기자들)가 이 기자 회견에 몰려왔다. 그러나 어떠한 보도도 이어지지 않았다. 학생들은 학생 소요에 대한 주제에는 일종의 터부가 놓여 있으며 반정부적인 출판물조차도 침묵할 만큼 누군가 강력한 사람에 의해 그 터부가 놓여졌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대학생 권리 수호»지의 기자 회견에 대한 유일한 보도는 인테르팍스 네트워크를 통해 보내진 단신이었다. 그 단신에는 소요에 대한 말은 없고, 단지 만일 더 이상 정부가 대학생의 권익을 무시한다면 대학과 정부 기관의 학생들로 돌격대를 조직할 것이라는 «대학생 권리 수호 - 모스크바»(«거대한» «대학생 권리 수호» 조합의 모스크바 지부) 의장의 위협만이 인용되었다. 이 단신은(통상 아주 불완전한 형태로 되어 있다) 몇몇(주로 지방의) 신문에서 다루어졌다.

1995년 4월 12일 소요와 그와 관련한 모든 것에 대한 그런 무관심한 태도는 만일 이를 «대학생 권리 수호»의 다른 행동들에 대한 대중 매체의 보도와 비교해 보면 특히 잘 드러난다. 예를 들어 1994년 10월 14일 «대학생 권리 수호»는 모스크바 국립대학 언론 학부 건물 앞에 있는 M. V. 로모노소프 동상 옆에서 집회를 열었다. 집회에서는 기껏해야 200명 정도의 학생이 참가했으며 게다가 대부분은 언론학부 학생들과 «호기심 많은 구경꾼» (정보 기관원들의 별칭)과 그냥 우연히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이었다. 몇 명이 이 행동에 참가했는지 정확히 말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그밖에도 필히 20명에서 30명의 주최자가 있었다). 왜냐하면 집회가 학부 건물 입구 앞에서 진행되어 학생들이 수업이 끝나고 밖으로 나오면서 자동적으로 집회 참가자로 변했기 때문이다(보통은 잠깐 서 있으면서 연사의 말을 듣고 떠나갔지만 다시 새로운 사람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연사들(그 가운데는 프레디 크루그(미국 공포 영화의 등장인물-역주) 가면을 쓰고 가슴에는 «나는 오로지 장학금만으로 살았다»고 적힌 팻말을 달고 있었다)은 자신의 권리를 위해 투쟁할 것과 «대학생 권리 수호»에 가입할 것을 학생들에게 호소했다. 이들 모두의 머리 위에는 «자본주의 물러가라!», «자본주의는 똥이다!»라고 쓴 현수막이 나부끼고 있었으며 저고리 옷깃에 «살 빼고 싶으며 내게 물어라!»라는 내용의 배지를 달고 붉은 색 양복 상위를 입은 부르주아 인형의 화형식이 끝이 났다. 화형식이 끝이 난 이후 바로 그 자리에는 아무에게도 안면이 없는 젊은 사람(그는 줄곧 주최자들 주변을 빙빙 돌면서 그들에게 «대학생 권리 수호» 프로그램과 그 밖의 것들에 대해 물었다)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서 있던 경찰관들에게 병을 던졌으며 집회는 곧 가열되었다(경찰의 «닭장차»는 바로 지척에 서 있었다). 바로 그 잘 알려지지 않은 젊은 사람이 누군가를 가리키자 경찰은 두 사람의 집회 주최자를 체포했다(저녁 무렵 국가 의회 대의원의 요구로 그들은 풀려났다).

이 소박하며 실제로는 축제와도 같은 사건에 대해 거의 모든 신문이 다 다루었으며(짧게나마) 모든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이를 이야기했고 다수의 현장 중계방송이 제작되었다. "청년과 성인"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은 30분 분량의 특별 방송을 이 집회에 할애하기까지 했다. «대학생 권리 수호»의 약삭빠른 활동가들은 집회 관련 주제에 대한 총 방송 시간이 1시간 49분에 달한다고 전했다. «새 일간지»는 «부르주아는 어떻게 탄내를 발산하고 무슨 냄새가 날까?»라는 이 사건과 관련된 유혹적인 제목의 특별 기사를 썼다.

왜 숫자도 적고, 조직도 허술하고, 우스꽝스러운 행동이 «주요 언론»과 (특히) 전자 대중 매체에 의해 광범위하게 조명되었을까. 그런데 그 당시 2년 동안의 가장 대규모의 대중 소요에 대해서는 침묵했을까. 다음과 같은 가정을 해볼 수 있다. 10월 14일 집회에 대한 광범위한 조명은 바로 그 사건이 심각하지 않고, 위험하지도 않으며, 우스꽝스러운 성격을 지닌다는 것과 그 사건이 «놀이의 규칙»에 부합한다는 사실로써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4월 12일 소요에 대한 침묵은 바로 이것이 공개적이고, 적극적이며, 부분적으로는 강력한 사회적 저항 행위였다는 것과 «놀이의 규칙»을 넘어선, 정부에 위협적인 행위였다는 사실로써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중 매체의 지도자들은 그런 사건이 «위로부터의 보도 규칙»(공적인 것이냐 사적인 것이냐는 중요하지 않다)을 지켜야 했던 것 이외에도 진짜 소요와 같은 행위들에 대한 «선전»이 자기들에게 나쁜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것 또한 두려워했던 것이다.

만일 시민 소요(학생 소요의 형태라고 해두자), 즉 정부에 대한 공개적인 대중적 반항이 러시아 정부와 «정치 계급»(«체제 순응적 야당»을 포함해서)을 두렵게 하고 걱정하게 만드는 그런 것이라면 (체르노미르딘의 진술에 따라 판단한 건데 두렵고 걱정스러운 게 사실인 듯하다) «나쁜 사례»를 한 번 숨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정보는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대안적» 언론 채널을 통해, 참가자들과 목격자들이 전하는 말에 의해 전파되었으며 우리가 보았듯이 심지어는 소문의 형태로도 전해졌다. 특히 그런 유형의 사건에 대한 100% 침묵은 역사가 보여주듯이 독재 정권의 경우에도, 외부 세계로부터의 국가가 폐쇄된 경우에 조차도 불가능하다.

논리적으로 볼 때, 정보 봉쇄 이후의 단계는 틀림없이 «부분적인» 정보 전달 즉, 의도적인 «관제 오보(誤報가 될 것이다. 실제로 상당히 늦게(4월 말에) «대안적» 언론에만 국한해서 4월12일에 «무언가가 일어났음»을 인정하는 두 편의 기사가 나왔다. «대안적» 언론에서 «주류 언론»으로 넘어가는 «과도적» 단계에 있는 «뉴스-특보» (영역은 Express-Chronicle이다-역주)지(발행 부수 15,000부)에 비탈리 보스크레센스키의 기사 «편안한 삶의 애호자»가 게재되었다. 이 기사는 그야말로 걸작이었다. 기사에는 «백악관» 근처에서 4월12일에 일어난 학생 집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집회의 진행과 이후의 소요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하고 있지 않다! 그는 사건의 설명을 학생들을 향한 길고 분명하지 않은(게다가 기사는 놀라울 정도로 명확하지 않은 언어로 대개 쓰여져 있었다) 욕설로 대체 했다. 기사에는 학생들이 유독 징집에 저항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는 학생들에게 징집 유예의 특혜를 왜 주며,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뭐가 더 나은가? 하며 분개했다. V. 보스크레센스키는 악의에 가득 차서 «아마도 학생들은 편하게 흘러가는 삶이 나쁘게 바뀌는 걸 바라지 않는가 보지?» 하며 물었다. 그가 보기에 만일 사람들이 삶이 나쁜 쪽으로 변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범죄란 말인가? 특히 «편안한 삶의 애호자»라는 «비난적» 기사 제목 자체도 놀라웠다. 아마도 그는«불편한 삶의 애호자»도 있다고 진정으로 생각한 모양이다(틀림없이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위한 여러 가지 불편함을 의식적으로 만들어 낸다. 예를 들어 축축하고, 더럽고, 위험하게 걸어 다니기 위해 구두 밑바닥을 뜯어 내고, 가구에 몸을 묶어 놓고 서서 잠을 자고, 출근 시간에 늦어 상사의 잔소리를 듣기 위해, 직장으로 가는 도중에 길고 돌아가는 길을 선택하고, 먹지 못하는 것들로 배를 채우고...). 그렇다면 이런 «불편한 삶의 애호자»는 모든 사람들의 본보기로 삼아야 마땅하다.

«뉴스-특보»는 전통적으로 «반 정도 반정부적인» 성향의 사람과 정치 세계의 «비주류»가 읽는데, 그 중에는 좌파도 있었다. 따라서 이 신문에 4월12일 사건에 대해 완전히 독자를 속이는 기사가 나온 것은 매우 정확한 조치였다.

잘못된 정보를 전달할 필요가 있었던 또 하나의 집단이 남아 있었는데, 바로 젊은이들이다. «모스코브스키 콤스몰레츠»지(誌)에는 «부서지지 않은 유리가 없다. 부서지지 않은 머리는 있다»라는 제목의 예카테리나 골로바츠까야에의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 또한 그야말로 걸작이었다. 보스크레센스키의 기사와는 달리 이 기사는 명확한, 회상적 언어로 쓰여졌다. 그러나 그 기사 속의 사건은 약간 이상하게 설명되었다. «4월12일 급진적인 학생들이 술판을 벌였다. 그것도 바로 정부 청사 앞에서. 모든 진정한 러시아의 술판처럼 이 술판도 소동으로 끝이 났다. «대학생 권리 수호» 조합은 과장된 말을 좋아하는데 그런 까닭인지 이 소동 자체를 «모스크바 학생 봉기»라고 부른다. 집회에는 약 5천명이 모였다. 얼마나 맥주를 많이 마셨는가에 대해서는 계산을 할 수가 없으며… 군중은 모스크바 시내를 돌아 다니기 시작했고… «수호자»의 통솔 아래 그들은 시청, 구(舊) 아르바트 거리, 그리고 나중 그들이 검은 페인트를 부어 버린 참모 본부 건물 앞까지 갈 수 있었으며… 다 함께 «올비-디플로마트»의 강철 같은 쇼윈도를 박살냈다… 참모 본부 옆에서 실컷 욕설을 퍼 부운 다음 학생들은 크레믈린 담벼락에 머리를 부딪히러 갔다. 그 곳에서 결국은 쫓겨났는데… 두 시간 동안 그들 술 취한 군중은 모스크바를 누비며 비틀거렸고, 유리를 깨고 욕설을 퍼붓고 지나가는 행인들을 놀라게 했다. 그렇게 젊은 폭도들은 최초의 정치적 권위를 얻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맥주를 좋아한다. 만족을 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많은 수의 지역 집단이 있다. 규칙적으로 «세툰의 피오네르(과거 소비에트 시기의 공산소년단원-역주)»는 «노긴 공장 피오네르»의 낯짝을 때린다. 그런 다음에는 폭력죄로 15일 동안 감옥에 갇힌다. 그리고는 화도 내지도 않고…»

말하자면 어떠한 학생 소요도 없었다. 경찰 특공대와의 충돌도 없었다. 취해서 벌인 비열한 소동과 일상적인 폭력이 있었으며, «대학생 권리 수호» 활동가들은 불량배(«세툰의 피오네르»)와 전혀 구분되지 않는다. 선전적 관점에서 보면 그녀의 접근 방식은 비록 독창적이지는 않지만 강력하다. «비하» 방식을 통해 욕하는 방법은 옐친-가이다르 정권 반대파를 비난하기 위해 정부 언론이 1992년 초에 이미 적극적으로 적용하였다. 그 당시는 모든 불만 분자들을 «룸 팬» 주변 분자», «낙오자»)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화가 난 교수들은 신문에 자기가 왜 «룸 팬» 인가? 하고 썼다. 인문학 박사이자 몇몇 외국 학술원 회원인 어떤 여성의 한 통의 편지가 기억난다. 이 불쌍한 여성은 자기가 5대째 내려오는 지식인 가문 출신이며, 모계로는 귀족 출신이며 18살부터 단 한번의 휴식도 없이 노력 봉사를 하고 있는 데 갑자기 자신을 왜 «룸 팬»이라고 하는지 물었다. 사실 «룸 팬» 이라는 꼬리표를 모든 반대파들에게 붙이려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학생 활동가들을 술 취한 불량배와 동일시하는 것은 아마도 성공하지 못 할 것이다. 하지만 시도 해 볼 수는 있다.

이번에도 맥주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집회에서 맥주를 실제로 마셨다. 맥주를 약삭빠른 상인들이 적극적으로 팔기도 하고, 오스따프 벤데르의 유명한 슬로건에 따라 공짜로 나눠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주는 마약(LSD)이 아니다. 술을 마신 다음 크레믈린 습격으로 연결 되려면, 도대체 모든 군중들이 얼마나 맥주를 마셔야 하겠는가?! 그리고 또 한가지, 경찰 특공대는 최루탄 가스의 도움으로 학생들을 빠르고 효과적으로 진압했다는 사실이다. 술 취한 사람들에게 최루탄 가스는 효과가 없다.

대체로 E. 골로바츠카야는 정확성에 무엇보다 덜 주의를 기울였다. 이 기사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썼다. «작년에 «수호자»는 APOS에 3천명을 데리고 갔고 몇 건의 싸움을 조직했으며, 분수대에 부르주아 인형을 빠뜨렸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그들은 실컷 날뛰었다.» 이것은 1994년 4월 12일 사건에 대한 이야기다. «데리고 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디로 «데리고 갔는가»? «몇 건의 싸움»은 무엇을 뜻하는가? 누구를 누구와 싸우게 만들었단 말인가? 자기들끼리? 분수대에 대해서는 완전히 우스개 소리가 따로 없다. 그 속에 빠진 것은 인형이 아니라 살아있는 부르주아였다. 인형은 우리가 알다시피 오히려 그 반대로 불태워졌는데 그것도 4월 12일이 아니라 10월 14일이었다. 그러나 만일, 이 이야기가 «술 취한 불량배»에 대한 것이라면 그런 하찮은 일이 특별히 누구를 불안하게 하겠는가?

«대학생 권리 수호» 지도부는 현명하게 처신했다. 학생들은 보스크레센스키와 골로바츠카야의 기사를 수천 부 복사해서 소요 참가자들과 «대학생 권리 수호»의 모든 활동가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지방에다(올바른 논평을 달아서) 보냈다. 이런 «언론의 발언»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을 나는 직접 목격했다. 골로바츠카야에 대해서는 두 종류의 가장 오래된 여성 직업 가운데 하나를 일컬을 때 사용하는, 모두가 다 아는 한 짧은 단어(창녀를 말함-역주)를 사용했다. 그런데 보스크레센스키에 대해서는 내가 아무리 완곡하게 표현하려 해도 검열에 맞출 수가 없다. 학생들은 «뉴스-특보»에 대해서도 «모스코브스키 콤소몰레츠»에 대해서도 더 이상 좋은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들은 오로지 «위선적이고 돈에 좌우되는 타락한 신문»이었다. «모스코브스키 콤소몰레츠»에겐 물론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한때 구세프는 자신이 통속적인 신문을 만들고 있다고 이야기 한 바 있다. 그리고 «뉴스-특보»는 공을 자기 골대에 넣은 꼴이 되었다.

세 번째 소요. 트베리. 1994년 5월19 ~ 20일 밤.

사건이 발생한 장소는 트베리 국립 대학교 캠퍼스 안이었다. 특히, 그 곳에서 발생한 사건은 조건부로 «소요»라고 부를 수 있는데 아무튼 소요를 일으킨 사람은 대학생이라기보다는 경찰이었다.

사실, 소련 공산당과 그 하부 조직(콤소몰 (과거 소비에트 시대의 공산 청년 동맹을 일컫는 말이다-역주)과 피오네르 조직을 포함해서)의 금지와 소련의 붕괴 이후 트베리 국립 대학 캠퍼스에서는 갑자기 «건강하지 못한» 전통이 생겼는데 그것은 바로 피오네르 조직의 탄생일을 축하하는(잊어먹었거나 모르고 있는 사람을 위해 나는 피오네르가 1922년 5월 19일에 탄생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바이다) 것이었다. 축제는 학생들이 벌이는 대규모 술판의 형태로 발생했지만 1994년에 이 술판은 이미 특별한 의례로 발전했는데, 피오네르 배지를 달고, 넥타이를 매고, 밤새도록 피오네르가(歌)와 콤소몰가를 부르고, 나팔을 불고, 북을 치고, 줄지어 행진하고, 피오네르 모닥불을 피워야 되는 걸로 여겨지게 되었다. 게다가 해가 갈수록 축제는 술판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고(학생들이 가난해졌고 술도 보드카에서 맥주로 옮아 갔는데 하지만 맥주를 살 돈도 충분하지 않았다) 대신 그것에 대한 보상으로 더욱더 대중적이고 «피오네르적인» 행사가 되었다. 이것은 물론 스쪼브였지만 새로운 부르주아 권력에 대한 분명한 도전 요소들을 지니고 있었다. 2년 동안 정부는 고맙게도 이 노래와 모닥불과 나팔 소리가 있는 학생들의 거대한 술판을 무시했다. 그런데 1994년에 모든 것이 변했다.

4월12일 모스크바 소요에 참가했으며 트베리에 «대학생 권리 수호» 지부를 창설할 생각에 고무된 소규모 학생 집단은 피오네르 탄생일이 이런 생각을 선전하는데 가장 편리한 기회라고 생각했다. 거의 술에 취하지 않은 학생의 환호 속에 그들은 캠퍼스가 «점거되었다»고 선언했으며, «반정부적 혁명 집회»를 개최했다. «집회»는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학생이 얼마나 열악하게 살고 있는가 하는 것과 «대학생 권리 수호»가 얼마나 훌륭한 조직인가 하는 두 가지 간단한 말로 압축되었는데 그런 이유로 트베리에 빨리 이 조합을 만들어야 한다는 거였다. «집회»는 성공을 거두었는데, 그 주된 이유는 쏟아지는 장대비가 «피오네르의 모닥불»을 꺼버리고 학생들을 방으로 몰아버렸기 때문이다. «적극적인 혁명 투쟁의 시작을 축하하기 위해» 연사 가운데 누군가가 «좀더 어른스러운» 노래인 «인터내셔널»을 부를 것을 제안 했다. 사람들은 다정하게 노래하기 시작했다(이상하게도 모두 가사를 알고 있었다).

공권력의 반응은 지체 없이 이어졌다. 캠퍼스 앞에 있는 스포츠길에 6대의 자동차와 엄청나게 많은 수의 경찰 특공대가 나타났는데 그들은 온몸을 무장하고, 헬멧을 쓰고 자동 소총을 지니고 있었으나 방패와 곤봉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캠퍼스로 소집 명령을 받은 것은 경찰 특공대에게는 전혀 뜻밖의 일이었음에 틀림이 없었다. 왜냐하면 경찰 특공대는 대부분 흠뻑 취해있었기 때문이다(그들 또한 잔치를 열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나중에 흘러다닌 소문에 의하면 놀란 시 정부가 전화를 걸어 캠퍼스가 «인터내셔널» 노래을 부르며, 붉은 깃발 아래 대열을 만들어 틀림없이 도시를 정복하려 하는 무장한 안필로프주의자들(유명한 공산주의자 안필로프를 따서 만든 용어로 여기서는 과격한 공산주의자를 의미한다-역주)에 의해 점거되었다는 소식을 전한 다음 경찰 특공대를 불렀다는 것이다.

«모두 엎드려, 이 창녀 같은 년들아!» 하고 고함을 치면서 경찰 특공대는 캠퍼스로 진입해서는 유리창과 문을 부수면서 망연자실해 하는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저항하지 않았다. 이미 취한 사람도 있었고, 저항할 수 없는 사람도 있었으며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완전히 잠들어 있었다. 잠긴 문(주로 여대생들의 방)은 경찰 특공대로 하여금 본능적인 분노의 폭발을 불러 일으켰다. 경찰 특공대는 문을 부수고 거의 옷도 제대로 걸치지 않은 여학생들을 때리기도 하고 무기와 마약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기도 하면서 끌어냈다(주로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아주 능숙하게 발길질 한 번에 문을 부수고, «여기서 누가 처녀야?! 대답해! 내가 처녀 전문이거든!»하고 야만적으로 소리치며 뛰어 들어온 술에 취한 건장한 경찰 특공대원을 많은 여학생들이 기억하고 있다.

어떤 층은 철장으로 막혀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은 그 철장을 잠궈 유린과 폭행으로부터 자신의 방을 구할 수 있었다. 옥상에서는 몇 명의 학생들이 방책을 쌓으면서 경찰 특공대에게 빈 맥주병을 퍼부었다. 그러나 경찰 특공대원들은 비록 취하긴 했지만 별다른 손실 없이 저항을 진압하고 옥상 수호대를 체포해 그들을 «닭장차»로 끌고갔다. 경찰은 왠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다른 학생들, «혁명 상징물»(깃발, 나팔, 북), 찾아낸 모든 술, 그리고 뭔가 낯설어 보이는 개인 소지품 등을 동시에 포획했다.

마구 두들겨 맞은 학생들은 «짭새들»과 옐친을 욕하고, 상처를 감싸고, 우는 여학생들을 진정시키기도 하면서 구석에서 기어 나왔다. 하지만 한 학생은 너무 세게 두들겨 맞아 골절상을 입어 병원으로 옮겨야만 했다.

기적적으로 체포되지 않은 «혁명가» 가운데 누군가는 «이제 권력의 흉측한 의도가 분명히 드러났다»고 소리 높여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며 «대학생 권리 수호» 조합을 즉각 설치할 것을 호소했다. 그리하여 트베리에 «대학생 권리 수호» 조합이 실제로 만들어졌다. 잡지 «검은 별»은 이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무정부주의 선동가 백 명이 1년 동안 해도 그런 효과는 달성하지 못했을 것이다»라며 완전히 빈정대는 어조로 실었다.

다음날 트베리의 모든 주요 신문인 «트베리 민회», «트베리 통보», «새 신문»은 «치안 회복을 위해 경찰을 불러들일 수 밖에 없었던 대규모의 캠퍼스 술 소동»에 대해 보도했다. 이 모든 기사는 마치 한 사람이 쓴 것 같았으며 «술취한 무뢰한»에 대한 놀라울 정도로 많은 예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예를 들어 학생들은 자기 노트와 교과서를 갈기갈기 찢어 10층 창문에서 내던졌으며, 한 밤중에 금지된 노래(«인터내셔널»?)를 불러 일반 사람들의 잠을 방해했으며, 평화롭게 산책하고 있는 사람들(한 밤중에?)에게 병과 물을 담은 봉지와 여타 물건들을 던졌으며, 심지어는 소방 호스(!)를 틀어 그들을 넘어뜨렸다고 쓰고 있다. 거기다가 학생들이 술이 취해 바로 건물 안에서 큰 모닥불을 피웠기 때문에 만일 공권력의 개입이 없었다면 캠퍼스가 깡그리 다 타버렸을 거라고 말했다. 지방 전자 언론 매체 역시 이와 비슷한 분위기로 기사를 썼다.

술취한 경찰 특공대의 «영웅적 행위»에 대해서는 물론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며 사건의 정치적 성격(또는 유사 정치적 성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술 소동»이라는 주제가 모든 것을 덮어 버렸다. 소동을 술취한 학생이 아닌 술취한 경찰 특공대가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학생들에게서 갈취한 물건은 돌려주지 않았다. 트베리 국립 대학교 총장에게는 주 정부의 징계가 주어졌으며, 다음해인 1995년5월 19일에는 어떤 종류의 기념식도 개최할 수 없게 되었는데 이런 안전조치들은 마치 캠퍼스에 학생이 아닌 체첸 전사가 살아서 취해진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이 지방 사건에 대한 진실을 쓴 언론은 거의 없었다. 객관적인 자료(그것도 아주 조금!)가 무정부주의 신문 «검은 별»(게다가 기사에는 «붉은 넥타이는 하늘에 날리고, 경찰 특공대는 소년단 부대를 물리쳤다네»라는 시적인 제목이 붙어 있다)에 나왔을 뿐이다. 그리고 «신(新) 네스토르»에는 그 유명한 드미트리 코스텐코가 트베리 기자인 사건의 목격자 이고리 만가제예프와 함께 «소년단이 기뻐한다»는 약간 부적절한 제목의 짧은 기사를 게재했다. «주요 언론»에는 트베리에서 발생한 사건이 고작 한 번 언급되었다. 약간 이름이 알려진 A. 츠베트코프는 «공공 신문(러시아어 명칭은 오브샤야 가제타-역주»에 쓴 «공산주의 이후의 학생들의 좌익병»이라는 기사에서 트베리 소요를 한 단락으로 요약했는데 그것은 실수투성이였다. 경찰 특공대에 대한 학생들의 «영웅적 저항»도 그랬고, 건물 안에 불을 지르려는 황당무계한 시도에 대한 언급도 그랬다.

네번째 소요. 이르쿠츠크. 1995년 4월 12일.

트베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르쿠츠크에서 일어난 사건도 단지 조건부로 «소요»라고 부를 수 있다. 4월 12일 이르쿠츠크에 있는 스포츠 궁전 앞 광장에서 APOS는 최고 우등생(성적표에서 모두 5점, 즉 수를 받은 학생-역주)을 제외하고, 일정한 수준 이상의 성적을 받은 학생들에게는 장학금을 주지 않겠다는 체르노미르딘의 결정에 반대하는 공식적인 집회가 개최되었다. APOS지도부는 학생의 90% 이상이 장학금을 받지 못할 것임을 재빨리 간파했다. 집회에는 이르쿠츠크의 입장에서 보면 전대미문의 숫자인 만 명이 모였다.

APOS의 공식 집회는 지루하게 진행되었으며 아무런 결과 없이 끝이 났다. 일반 학생들에게 말을 전달할 수 없었다. APOS지도부는 법과 대학생(그들 중 많은 수가 경찰에서 일한다)이 형성한 경계선에 의해 대중들로부터 격리되어 있었다.

결국 연단으로부터 집회 종료가 선언되었을 때, 이에 불만을 품은 2천명의 학생들은 산회를 거부하였으며 자연스레 주(州) 정부 건물 쪽으로 움직였다. 이동하는 도중에 학생들은 «장학금을 지급하라!, 장학금을 지급하라!», «우리도 먹고 살자!» 등과 같은 아주 소박한 구호들을 큰소리로 외쳤다. 이르쿠츠크의 «대학생 권리 수호» 조합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치안 경찰과 교통 경찰은 대열을 키로프 공원까지 몰아가서는 학생들이 공원 안으로 들어서자 사방에서 트럭으로 그들을 봉쇄하고 경찰 특공대로 공원을 에워쌌다. 공원 쪽에 도시의 모든 경찰력이 집중되었다. 학생들은 망연자실한 상태가 되었다. 모스크바와는 달리 포위를 뚫으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찰은 스스로가 매우 놀란 것처럼 최악의 사태에 대비했다. 한 경찰 고위직은 메가폰을 통해 « 반란을 꽤 하려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곳에 대규모의 경찰력을 투입할 것이다! 만일 필요하다면 사격도 할 것이다!» 하면서 마치 이성을 잃은 듯이 고함을 질렀다.

학생들도 이르쿠츠크 시장 고보린이 올 것을 요구하며(이것은 어리석은 행동이었는데, 그 이유는 고보린이 체르노미르딘의 명령을 취소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함으로 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보린은 가기가 두려워서 자기 대신 대리인을 보냈다. 학생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사건 장소에 이르쿠츠크 주지사인 유리 노지코프는 몸소 발걸음을 했다.

Yu. 노지코프는 자신도 예전엔 학생이었다는 이야기로 시위대를 진정시켜보려 했지만 그 자리에 모인 학생들은 그에게 요구 사항을 무더기로 쏟아 놓았다. 특히 그들은 대학 본부가 사업하는 사람들에게 기숙사를 임대해 학생들을 거리로 몰아내고 있는 것과 과학 기술 대학교에서 대학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학생에게 학위 등록을 위해 55루블의 최소 경비 지불을 요구하는 등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불법적인 강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 분개했다. 노지코프는 자신이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음을 사과하고 사흘 후 이 문제를 논의 할 대표단을 그 자리에서 선출할 것을 권고했다. 학생들은 대표단을 선출했다. 이르쿠츠크 역사에서 가장 대규모의 불법 집회는 그렇게 끝이 났다.

이 사건의 결말은 이러하다. 4월 13일에 경찰은 몇 명의 «가장 적극적인» 참가자들을 체포했다(효과적인 사진과 비디오 촬영의 도움으로). 지방 대중 매체는 전날 도심에서 사건이... 정확히는 «술 소동»이 발생했다고 이야기했다. 텔레비전에 시(市) 내무국 차장이 출연해 4월 12일에 허가된 조합 집회를 마친 다음 술 소동이 발생했지만 경찰이 제때에 취한 조치와 분노한 폭도들에게 가서 그들을 진정시키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은 주지사의 개인적인 용기 덕분에 이르쿠츠크는 급류에서 구원되고 파괴를 모면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시 내무국 차장은 흥분해서, 술취한 폭도들의 기괴한 탈선 행위를 묘사했으며 시청자에게 학생들이 돌아간 이후 소공원 전체가 산더미 같이 많은 빈 술병과 쓰다 버린 주사기와 경구 피임약으로 가득 찼다고 전했다. 그는 학생들이 무엇 때문에 피임약을 먹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지역 신문 역시 차장의 설명에 동조하며 똑같은 말을 한결같이 반복했다. 학생 소요와 그 원인에 대한 괘 믿을 만한 기사가 실린 «소비에트의 젊은이»지 만이 유일한 예외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단지 가장 이름있는 이르쿠츠크의 무정부주의자인 이고리 포드시발로프가 이 신문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이 신문의 주간은 기사 게재에 대해 주 당국으로부터 문책을 당했지만 주간이 더 두려워하는 것은 지방 정부가 아니라 포드시발로프였다. 포드시발로프는 이르쿠츠크에서 «폭도»의 명성을 얻고 있는데, 폭력행위에 관한 일로 자신에게 소송이 제기되자 어느날 그는 다짜고짜 자기 신문 주간의 면상을 후려쳤던 것이다.

학생들의 요구 조건의 충족과 관련해서 주 정부는 학생들의 마음을 잔뜩 부풀게 했다. 대표단은 6월 2일 전까지 주 정부와 수 차례 협상을 했지만 아무런 결과도 얻어내지 못했다. 과학 기술 대학교의 강요는 철회되지 않았고, 기숙사와 관련한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으며, 공식적인 학생 조합인 APOS도 학생들의 탈퇴로 인해 고립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그 다음에는 여름 방학이 다가오고 마침내 주 정부는 학생 문제를 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르쿠츠크 소요에 대한 진실을 읽는 것은 «소비에트의 젊은이» 이외에, 극히 적은 부수를 발행하는 무정부주의-노동조합 지상주의자 협의회(KAS)의 정보지인 «KAS-콘탁트(접촉을 뜻하는 러시아어이다-역주)»에서만 가능하다. 거기서 지역 무정부주의자 V. 미하일로프는 이 사건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중앙 대중 매체는 물론 학생들의 입장을 무시했다. «이르쿠츠크»라는 단어가 중앙지 지면에 잠시 나오기는 했고, 중앙 텔레비전에 공식 집회에서 발췌한 수 초짜리 장면이 4월 12일 노동조합 활동(4월 12일이 FNPR이 정한 전 러시아 노동조합 활동 기념일임을 기억하라)이 벌어진 도시들을 열거할 때 한 번 깜박거리기는 했다. 이것은 아마 사건을 «조명하»과는 전혀 거리가 멀 것이다. 오히려 «어둡게 하는 것», 일종의 관제 «일식» (日蝕)이다.

이제는 결론이다.

1994년 4월12일 모스크바에서 발생한 소요에 대한 침묵과 1992 ~ 1993년 사이에 발생한 거리 소요에 대한 조명(비록 이념화된 것이긴 하지만)은 4월12일 사건의 자연발생적 성격, 소요 참가자들의 사회적 면모와 직접 관련되어 있음을 감히 단언할 수 있다. 좌파적 반정부 세력은(더구나 공산주의자들은) 서구의 정치 선전 규칙에 따르면 «나쁜 녀석들»인데 그들은 사회에서 온갖 종류의 소요를 조직하기에 그들에게서는 더 기대할 것이 없다. 그런데 당연히 그들과는 반대되는 «우리를 지켜주는»(탐정소설을 들여다 보라, 탐정소설을 읽어보라!) 경찰인 «좋은 녀석들»이 있다. 학생들은 대개가(무정부주의자 학생, 공산주의자 학생이 아니라 그냥 학생) 이미 국민이다. 그런데 자국 국민은 선동가의 규칙에 따르면 «나쁜 녀석»이 될 수 없다. 게다가 대체로 국민은 «항상 정부를 지지한다»(이것은 특히 권력이 정통성을 설명하는 공식적인 방법이다). 순수한 학생 소요에는 «우리(좋은 녀석들)와 그들(나쁜 녀석들)의 대립»이라는 고전적 선전 도식을 적용할 수 없었다. 여기는 다른 도식이 필요했는데 이것 또한 고전적 선전 방식으로서 «꼬리표 붙이기»라는 방법이다. 그러나 권력은 이것에 대한 좋은 생각이 바로 떠오르지는 않았으며, 게다가 꼬리표를 즉시 가려낼 수도 없었다(꼬리표는 정치 선동가의 규칙에 따르면 눈에 잘 띄고, 기억하기 좋고, 볼품 없고, 단순하고 그리고 중요한 것은 명확한 듯 하게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꼬리표의 «합법성»을 입증할 필요성이 발생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즉 꼬리표는 고의로 실행 불가능하게 만들어 놓은 과제인 것이다). «술취한 난동꾼»이라는 그런 꼬리표가 발견 되자 대중 매체의 입장도 수정되었다.

러시아에서 «언론 자유»의 시대는 «페레스트로이카»와 함께 끝났다는 견해가 광범위하게 펴졌는데, 지금 우리는 과거 소비에트 시대의 대중 매체 통제 및 조종 체제로 더 노골적으로 회귀하고 있다. 물론 좀더 약하고, 자유롭고, 좀더 은밀한 형식이기는 하지만. 학생 소요와 관련된 실례는 이것이 잘못된 시각이었음을 보여준다. 그와는 정반대로 러시아의 대중 매체는 더욱더 서구의 대중 매체와 닮아가고 있는데, 따라서 정보 전달에 대한 통제에 있어 러시아식이 아닌 서구식 체계가 더 노골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물론 여기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서구 대중 매체가 전달하는 정보 내용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 매체의 실질적인 기능 작용에 관한 것이다.

1994~1995년에 있었던 학생 소요에 대한 대중 매체의 반응은 그런 경우에 소비에트 체제가 만들어 냈던 방법에 대한 전적인 거부를 보여주었다. 특히, 소련에서는 유사한 종류의 사건들이 수도가 아닌 지방에서 비밀에 붙여졌다. 이것은 서구의 기자들과 외국인의 대체로 많은 숫자가 수도에 살고 있었다는 실용적인 이유에서 설명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지방에서는 공공의 반응(특히 신문의)이 서구의 생생한 사건 관찰자가 없었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존재하지 않았지만 서구의 소비에트학 센터와 선전 기관들(예를 들어 라디오 «자유») 은 지방 신문도 구독했다고 알려져 있다.

소련에서 그런 유형의 사건들은 틀림없이 공산당 조직에서의 특별(비공개일 수도 있었지만)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특별 심리는 뒤따르는 «징벌 경중 결정», 비공개 당 회의 수행, 즉석에서의 «정치 교육» 캠페인 실행 등으로 이루어졌을 있다. 그러므로 심지어는 대중 매체에 조명되지도 않으면서(수다쟁이는 스파이에게는 횡재나 마찬가지다) 사건은 권력에 의해서도, 주민에 의해 의해서도 제일 중요한 주제로 실질적으로 인정되었다.

서구의 방법론은 체제를 위해 이익이 되지 않는 사건은 만일, 이것이 기술적으로 가능하기만 하면, 정보 공간에서 몰아낼 필요가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첫째로는 침묵하면서 몰아낼 수 있고, 둘째로는 다른,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정보를 이용해 10단짜리 위치로 «움직이면서» 몰아낼 수 있다. 이 때, «센세이션»은 인위적으로 부풀려지거나 심지어는 완전히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침묵의 방법은 최근 몇 년간 서구 대중 매체에서 유고슬라비아 분쟁을 보도 할 때 극명하게 그 실체가 드러났는데, 그 당시 대중 매체의 보도 가운데 세르비아 인들에게는 유리하고 크로아티아인과 회교도에게는 불리한 모든 정보는 주도 면밀하게 걸러졌다(그 결과, 히틀러를 크로아티아의 명예 시민으로 선언했다는 엄청나게 충격적인 사실조차도 서구 사회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움직이기» 방법은 루안다의 예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루안다의 비극은 실제로 경제의 완전한 붕괴에 의해 야기 되었는데, 1989년 말에 국가 관리를 맡은 IMF가 실시한 «경제 재건 프로그램»의 결과로 붕괴가 시작되었다. IMF의 프로그램이 서구 대중매체에 의해 광범위하게 선전이 되었기 때문에 그것의 비극적인 결과, 즉 80만~100만에 이르는 사람의 사망 소식은 «방송의 뒤안길»로 밀려나야만 했다. 루안다의 비극이 최고조에 달한 몇 주 동안 이 작은 나라에서는 50만 명의 사람들이 죽었는데, 이 루안다발 소식은 정보란의 맨 마지막 부분에 «자세한 설명도 없이» 실렸다. 당시 뉴스 제목들은«과장된» 센세이션으로 흘러 넘쳤는데 다이아나 황태자비를 둘러싼 하잘것없는 스캔들부터 시작해서 통 속에 빠진 고양이를 위해 장시간 구조 활동을 벌였다는 바보 같은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정치적 사건의 정보적인 탈 정치화는 고전적인 서구식 방법이다. 특히 1992년의 로스앤젤레스 폭동은 이미 사건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다인종적 성격과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대립으로 그 노선이 정해졌으며, 몇몇 도시(로스앤젤레스, 로체스터, 담파, 라스베가스) 에서 정치 구호 아래 도시 게릴라의 조직적인 행동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 대중 매체에 의해 약간의 인종적 색체를 띤 범죄 현상으로 주로 보도되었다. 소련에서는 정반대로 비 정치적인 현상, 즉 재즈, 댄디즘, 히피, 펑키, 록 등등 조차도 정치화되었다. 그리고 폭력적인 행위는 정의(定義)에 따르면 소비에트 국가와 사회주의적 법과 질서에 반대되는 행동이었는데 이는 당연히 세계 제국주의의 음모로 해석되었다

국민의 불복종 또는 권력에 대한 강력한 저항 행동에 대해 침묵하는 방법은(특히 사건이 매력적인 것으로 보여질 수 있을 그 때) 서구 대중 매체의 행태를 통해 또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영국의 대중 매체는(심지어는 노동 당원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오랫동안 대처의 세금 개혁에 반대하는 인두세 반란(Poll Tax Revolt)의 적극적인 활동을 숨겼다. 그래서 많은 정보 소비자들에게는(영국과 특히 외국에서) 트라팔가 광장에서의 대규모 소요는 완전 뜻밖의 일로 여겨졌던 것이다. 프랑스에서 그런 장면은 1994 ~ 1995년에 발생한 경찰과 «유색인 집중 거주의 변두리»의 젊은이들의 대립 관계에서 목격 되었다.

소련에서는 반대로 저항의 폭력적 성격이 엄격한 진압을 위한 근거가 되었으며 경찰의 폭력을 «정화하는» 구실을 했다. 그래서 만일 사건을 침묵시키는데 성공하지 못했다면, 그 사건의 «반 사회적»이고 폭력적인 성격에 특별한 주의가 기울려 졌다. «법률 위반자» 쪽에서 폭력 행위에 대한 얘기가 붉어져 나오면 권력 쪽의 폭력의 정당성에 대한 물음이 그 밑에서 덮어 져 버렸다. 이것은 80년대 말의 청년 소요의 예에서 잘 드러나는 데, 예를 들어 알마-아타나 알메티에프스크에서 그런 유사한 종류의 사건이 한편으로는 이미 세상에 알려졌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고전적인 소비에트의 체계와 경찰의 진압과 이념적 선전들이 또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1994 ~ 1995년 사이의 학생 소요를 대하는 우리나라 대중 매체의 태도로 볼 때, 러시아 대중 매체가 서구 대중 매체 작용의 고전적 체계를 습득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특히, «부정적인» 정보에 대한 반응 부분에서 더욱 그러하다. 체계의 «완성» 수준에서 보면 러시아 대중 매체는 전통적으로 강력한 좌파적 반정부적 정치 정당과 조직을 지닌 서구 국가들에(예를 들어 프랑스에) 이미 접근했다. 그러나 대중 매체를 통한 허위 사건의 제작과 전달의 조정 시스템 같은 그런 중요한 현상이 없다는 점에서는 «일차원적인» 미국과는 아직 상당히 거리가 멀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아직 세 개의 인용 즉, 세 개의 제사(epigraph)가 있다(만일 그리스어 «에피» 를«위에» 가 아니라 «후에»로 번역한다면)


«정보 이론에 대한 어떤, 극도로 소름 끼치는 계속적인 악용이 있다고 하자. 이때 그 이론은 어떤 육체적 고통보다 더 끔찍한 고문 도구가 될 것이다. 정보의 선발, 제동, 봉쇄 등의 이런 방식으로는 정말 한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무시무시한 프로크라스티스(잡아 온 사람을 자기 침대에 맞게 자르고 느렸다는 그리스 신화의 등장인물-역주)를 만들 뿐이다...»

스타니슬라프 렘


우리는 다하우와 아우슈비츠(2차 대전 때 독일군이 만든 포로 집단 수용소 명칭-역주)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대중 매체을 이용한 교활한 음모는 사람들에 대한 통제를 훨씬 더 효과적으로 보장해 주는 정신적인 집단 수용소를 만든다. ..

짐 해리슨


자국민들에 대한 대중 매체의 영향은 국민들이 말하는 것 속에 존재하기 보다는, 차라리 국민들이 침묵하는 것 속에 존재한다... 그 결과, 국민을 체제 순응으로 이끌며, 사회에 대한 비판적 태도의 형성 가능성을 거의 주지 않으면서... 대중 매체가 비록 간접적이긴 하지만, 진정으로 비판적인 세계관의 진실한 발전을 효과적으로 방해하는 일이 이어진다.

라자르스펠드, 로버트 킹 멀톤


 

월간지 <이론과 실천>에서 게재된 바 있습니다